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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사는 청년 아주인! 재미사업가 송진국 동문(201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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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동문회 작성일20-02-10 16:59 조회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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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국 동문은 在美사업가이다. ‘성공한 사업인’이라는 말이 어색하고 싫다는 송진국 동문은 지난 30년 동안 남다른 호기심과 실천력, 성실함으로 자신만의 사업 밭을 일궈왔다. 그러는 사이 사람을 얻고, 기회를 얻고, 세상을 조금 더 가치 있게 살아갈 열쇠를 얻었다. 그는 기업가 이전에 자유주의자, 실천가, 발명가이기도 하다. 지난 2월 잠시 한국을 찾은 길에 모교에 들른 송진국 동문을 만났다. 비즈니스는 그저 문제를 즐겁게 푸는 게임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던, 유쾌하고도 가슴 뿌듯했던 시간이었다.

 

73학번이십니다. 입학하신 지 40년이 되었는데요. 아주대학교 1기라는, 남다른 감회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어딜 가든 아주대 1호라는 생각은 늘 머릿속에 있어요. 항상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우리 동기들 모두 그럴 겁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모두 재밌었죠. 좋은 학교를 들여다보면 학생들이 진짜 자유를 즐길 줄 알아요. 규율에 얽매이기보다는. 시대적으로 지금과 달랐지만, 그때 우리가 그랬던 것 같아요. 모두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자유로운 대학시절을 보냈으니까.

 

어떤 학생이셨나요?

집은 제기동이지만 기숙사에서 생활했어요. 주말에 친구들하고 수원에서 놀자 하면 우르르 원천유원지로 남문으로 몰려다니곤 했어요. 기숙사 뒤로 산 두 개 넘으면 원천유원지였는데, 그 코스로 많이들 다녔지. 시장에서 땅콩 팔고 길거리에서 엿도 팔아보기도 했고… 방학뿐 아니라 주중에도 일을 많이 했어요. 이런저런 일을 좀 하고 싶더라고. 산악회 하킨스클럽 멤버였는데, 거기 선배님 보조하면서 산악가이드로도 뛰었어요. 금요일마다 답사를 가느라고 김설자 교수님 영어수업을 많이 빠졌었죠. 교양영어 학점도 자동으로 안 좋았고. 하하.

 

말씀을 들어보니 단순한 아르바이트 이상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비즈니스 감각이 남다르셨던 것 아닌가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비즈니스는 게임이에요. 바둑, 화투, 카드처럼 상대방하고 플레이하는 거죠. 그래서 재미있지요. 다른 이 돈 가져오기 얼마나 어려워요? 10원짜리 엿 하나를 20원에 팔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신 나는 일이에요? 그땐 돈도 필요했지만, 그런 게 재미였어요. 사람들을 잘 설득하고, 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려고 연구도 좀 하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만큼의 이익을 내는 것들이 말이죠.

 

그렇다면 졸업 후에 곧바로 사업을 하셨나요? 미국으로 건너가신 이유도 궁금해집니다.

미국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하하하. 내가 화학공학을 전공했잖아요. 전공 살려 피어리스 입사해 1년 정도 연구원으로 일했어요. 비자를 신청하고는 세상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1년 6개월이나 걸렸어요. 그동안 동진제약 다니면서 연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네요. 미국으로 갈 때만 해도 특별한 목적은 없었어요. 여행하는 기분으로 자유롭게 이것저것 도전해보고 싶었지요.

 

미국에서의 생활과 도전들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가자마자 어느 화장품 회사에 무작정 지원서를 냈어요. 채용공고가 난 것도 아닌데 무조건 찾아갔죠. 사장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몇 시간을 버티니까 사장이 내려오더라고.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젊은 사람, 내가 뭐를 도와주면 좋겠냐”고. 그때만 해도 내 영어가 서툴러서, 일자리 구하러 왔다고, 돈 안 받아도 좋으니 연구실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글씨로 써서 가까스로 대화했어요. 그랬더니 흔쾌히 내일부터 나오라는 거야. 와! 이제 됐구나… 그렇게 시작했어요.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그때가 28살이었어요.

 

그것이 어찌 보면 선배님 비즈니스의 시작이었군요. 그 후에 어떻게 발판을 이뤄나가셨는지 궁금해집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적어도 난 그때 두려움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일하는 모양이나 자세가 미국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잖아요. 다른 연구원들이 일을 쌓아놓고 있을 때 나는 일이 오는 족족 정리해버리니까 처음엔 일도 안 시키다 점점 많은 일을 맡기더군요. 입사하고 2주 만에 8백 불을 받았고, 2년 만에 연구실장이 되었어요. 화장품으로 하는 여드름 치료 관련 책도 썼고. 그즈음 다른 화장품 회사가 날 스카우트해갔지요.

 

1994년에 화장품회사 나테라 인터내셔널을 설립하셨어요.

나테라는 작은 회사이지만, 보유하고 있는 몇몇 브랜드는 미국 사람들한테 꽤 사랑받고 있어요. 베이비 매직이라는 브랜드는 존슨에 이어 2위이고, 스페셜 티 스킨 케어 제품들은 미국 전역 4만 개 스토어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250여 명 직원이 정말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일해주고 있습니다.


기업을 운영하시면서 어려운 순간들을 잘 헤쳐나가는 선배님만의 경영비법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늘 어렵고 모든 게 도전이지요. 나는 모든 것을 문제 푸는 것에 비유하곤 해요. 살면서 무수한 문제를 만나고 풀어야 하지 않아요? 어떤 이는 문제 풀기를 아주 싫어해요. 그렇게 되면 문제가 점점 더 커지기만 하죠. 하지만, 문제 푸는 걸 재미 삼아 하면 달라져요. 어떻게 풀어나갈 것이냐…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요. 물론 이것도 훈련해야 하고, 그런 면에서 교육은 문제 푸는 방법을 발전시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런 긍정적인 생각은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 아닐까요? 선배님의 자산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 많이 놀아야 해요. 이것저것 많이 해봐야 하고. 아이였을 땐 어머니 말씀을 무척 안 들었어요. 하지 말라는 것 계속하고, 가지 말라는 곳 꾸준히 가고. 하하하. 여하튼 계속 몸이랑 생각이 움직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몽상가는 아니었죠. 무척 현실적인 아이였거든요. 대학시절에 장사를 했던 것도 이런 내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요. 전 특허도 11개 갖고 있어요. 생각하는 걸 곧바로 실행해보자는 주의니까. ‘스토리 리더’라고 종이 아래에 놓으면 글을 읽어주는 패드도 개발했고, 불을 붙이면 노래가 나오는 ‘싱잉 캔들’도 만들었었죠. 큰돈은 안 되었지만, 나름 꽤 멋진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에 모교를 위해 발전기금 1억 원을 쾌척하셨습니다. 후배들에게 인턴십 기회도 마련해주실 것으로 들었는데요.

어렸을 때는 돈을 좀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야말로 하수죠. 쉰 살을 넘어서면서 생각이 바뀌었는데, 남을 위한 사업이어야지 않나란 생각을 해요. 기업을 운영해 이익이 남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남을 위해 쓰면 좋지 않겠나? 그 대상이 직원들이 될 수 있고, 친구와 후배들이 될 수도 있겠죠. 앞으로 두어 명 정도 인턴십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뜻이 있으면 도전해보라고, 와서 놀아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화장품회사는 종합예술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연구는 물론이고 마케팅 분야까지 다양한 분야가 어우러져 있지요. 후배들이 와서 스펀지처럼 얼마나 적셔갈 수 있는지가 중요해요.

 

?1만여 후배들이 아주대 캠퍼스를 누비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격려의 말씀 부탁합니다.

공부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을 즐기고 얼마나 창의적인가입니다. 경직되고 보수적인 생각을 버려야 해요. 물론 그런 생각으로 성장하고 일하면서 돈도 잘 벌고 성공하는 사람도 많지요. 하지만 늘 자신을 젊게, 깨어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찾아야 합니다. 올해 새롭게 공장을 짓기로 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말렸어요. 이제 나이도 있는데 그만 하라는 뜻이죠. 하하. 작은 회사지만, 화장품 분야에서만큼은 세계 랭킹을 달리는 회사를 만들고 싶은데 나이가 중요한가요? 거창하게 도전이라는 말은 싫어요. 그저 재미나게 플레이하는 겁니다. 문제를 잘 풀면 비즈니스가 잘 되는 것이고.

덧붙여 우리 모교에도 바라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동안 잘 성장하고 발전해주어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조금 더 자유스러운 대학이 되었으면 합니다. 교수, 학생, 생각, 공부 모든 면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웠으면 해요. 그리고 모든 분야를 넘버 원으로 키울 수는 없는 법이니, 한 분야에서 특출한 능력을 자랑할 수 있는 대학이 되길 바랍니다. 기러기 한 마리가 수천의 떼를 이끌어가듯 대한민국, 세계에서 넘버 원인 학과, 연구분야, 교수님이 나오는 대학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도 늘 응원하겠습니다.

 

 

 

송진국 동문

아주대를 졸업하고 ㈜피어리스에 근무한 뒤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에 화장품 회사를 설립한 이래 지난 30여 년간 다양한 분야의 회사 12개를 운영하기도 했다. 1994년 텍사스주 플라워마운드에 화장품 회사 나테라 인터내셔널(Naterra International)을 설립했고, 현재 나테라를 비롯한 3개 기업의 CEO로 활동 중이다.

 취재와 원고: 이은형(사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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